2007년 10월 25일 목요일

Ernesto Guevara de la serna

누군들 힘겹고 고단하지 않겠는가
누군들 별빛 같은 그리움이 없겠는가
그대들이 한때
신처럼 경배했던 민중들에게
거꾸로 칼끝을 겨누는 일만은 없게 해다오'

Ernesto Guevara de la serna

2007년 10월 5일 금요일

주왕산 전설 첫번째 이야기

주왕산은 역사적으로 신라시대에는 석병산, 신라말부터 주왕산으로 불리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주방산 또는 대둔산(시증동국여지승람1530, 대동여지도1861,청송군읍지1861), 주왕산(양양기구록1757, 주왕산지1833)으로 불리었다. 이러한 기록은 관에서 발간된 문헌들은 주방산, 대둔산으로 불렀으나, 민간에서 발간되 문헌에서는 주왕산으로 불린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주왕전설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 후 청송군지(1937)에서 공식적으로 주왕산으로 기록한 후 정식적으로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신라 선덕왕의 후손인 김주원이 이곳에 와 있었다 하여 주방산이라 하였고 , 신라말엽 중국 당나라 사람 주도가 자칭 주왕이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한뒤 이곳에서 은거하였다하여 주왕산으로 불리고 있다.
주왕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왕은 진나라에서 복야상서 벼슬을 지낸 주으라는 사람의 9대손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이 주도였던 그는 어려서부터 천품이 범상치 않았을 뿐 아니라, 5세때 이미 글을 배워 11세 때에는 육도삼략(六韜三略)을 통달하였고 천문지리에도 능했다고 한다.주도는 이때부터 왕후장성을 꿈꾸면서 “황하강의 물을 들이마시고 태산을 갈아 없애겠다”고 말했다 한다. 그러나 주도는 진나라의 후손 중에 큰인물이 없음을 한탄했는데, 그는 성인이 되자 장사 1백명을 거느리고 웅이산에 들어가 1만여 명의 군중을 모와 남양땅에 웅거하며, 이때가 당나라 덕종15년(799년, 신라 소성왕1년)이었다.진나라의 후예인 주도가 후주의 천황임을 자청하며, 반기를 들고,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쳐들어가 대패하였다. 싸움에 패배한 주도는 숨을 곳을 찾아 요동을 통하여 신라로 도망을 왔다고 한다. 그때 주도를 따르는 군사는 1천여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후 관동지역을 거쳐 진성(지금의 청송군 진보면)에 다다른 주왕은 석병산(주왕산의 옛이름)이 매우 깊고 험준하다는 말을 듣고 이곳에 숨어들었으나, 식량이 없었으므로 인근 주민의 식량을 약탈하는 등 노략질을 일삼게 되자 석병산에 많은 산적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온 나라안에 퍼졌다. 이때 당나라 조정에서 주도가 신라땅으로 도망갔음을 알고 신라에 주도를 잡아 줄 것을 부탁해 왔다. 당나라로부터 주도를 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신라황제는 석병산 일대의 산적들이 주도와 그의 군사들임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마일성 장군과 그의 5형제들에게 명하여 주도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하였다. 결국 마일성 장군에게 패한 주도는 화살을 맞아 죽었다.